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라비 왕조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 ====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레자 샤는 이란의 중립을 선언했지만, 연합군의 통과를 거부하는 한편 국내 독일인을 추방하는 것도 거절했기 때문에 [[추축국]]과 협력한다는 의혹을 받았다. 1940년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과 독일의 교전이 시작되고 이란과 국경을 접한 이라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반영친독으로 선회하자 영국은 페르시아 만에 면한 송유시설과 중동지역 안보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또한 이란이 소련으로 향하는 [[렌드리스]] 물자가 통과하는 기점이어서 철도가 엄청 깔렸던 데다가 이란인들의 반영 폭동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불안해진 영국은 독일이 이란의 유전을 차지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연합국인[* 영국은 괴뢰국인 [[이라크 왕국]]에 군대를 주둔시켜 군정통치하고 있었고 [[인도 제국]]을 식민지로 삼고 있었는데 두 지역 다 이란의 좌우로 국경을 맡대고 있었다. 소련은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남하정책으로 이란의 세력권이던 [[캅카스]] 지역과 [[중앙아시아]] [[칸국]]들을 전부 뺏어먹고 [[카스피 해]]를 사이에 두고 북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즉 그야말로 이란은 포위된 형국이었다.] [[소련]]과 함께 이란에 최후통첩을 날리고 무단으로 [[페르시아 침공|이란을 침공하여]] 이란에 주둔했다([[페르시아 침공]]). 이 페르시아 보급로를 통해 연합군은 500만톤 이상의 대량의 보급 물자를 소련에 공급할 수 있었으며, 1943년 9월 9일 이란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다. 1943년 11월, 테헤란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이오시프 스탈린이 참가한 [[테헤란 회담]]이 열렸다. 한편 레자 샤는 침공 직후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팔라비 2세)에게 양위하고 퇴위하였으며, [[모리셔스]] 섬으로 망명했다. 이후 [[남아프리카 연방]][*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된 것은 1961년.]의 [[요하네스버그]]로 망명하여 1944년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